글로벌 투기 자본 앞에서는 늘 속수무책이라는 패배주의
과거 론스타부터 이번 엘리엇 사태까지,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수천억 원대의 소송을 제기할 때마다 시장에는 짙은 패배주의가 깔립니다. 대중과 언론은 "탐욕스러운 막강한 글로벌 자본에 얕보였다", "결국 힘없는 정부가 천문학적인 국민 혈세를 뜯길 것"이라며 분노와 체념이 섞인 반응을 쏟아냅니다.
이러한 공포는 글로벌 금융 엘리트들이 쳐놓은 정교한 법적 덫(ISDS)의 파괴력을 우리가 과거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장의 노이즈와 막연한 두려움을 걷어내고 냉정하게 상황을 들여다보면, 무적일 것만 같았던 그들의 논리에도 치명적인 균열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ISDS의 무기화와 행동주의 펀드의 사냥법
ISDS(투자자-국가 분쟁 해결 제도)는 본래 해외에 진출한 기업이 투자 유치국의 불합리한 정책이나 몰수로 인해 억울한 피해를 보지 않도록 만든 보호 장치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이 제도는 거대 헤지펀드들의 수익 창출을 위한 '창'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들은 타깃 국가의 기업 지배구조 개편 과정이나 정부의 미세한 행정적 개입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고, 아주 작은 틈이라도 보이면 이를 물고 늘어져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뜯어내는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했습니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은 그들에게 완벽한 먹잇감이었습니다. 지배구조 승계라는 특수한 상황,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지분을 쥐고 있던 국민연금의 찬성 표결. 엘리엇은 "한국 정부(국민연금)의 부당한 개입으로 주주인 우리가 손해를 봤다"는 논리로 약 1천 5백억 원이 넘는 청구서를 들이밀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한 기업의 문제를 넘어, 국가의 공적 연금 운용 체계를 국제 무역 협정의 도마 위에 올린 치밀하고도 공격적인 사냥이었습니다.
3%의 바늘구멍을 뚫은 '논리의 역전'
2023년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가 엘리엇의 손을 들어주며 약 1억 782만 달러(약 1,556억 원) 배상 판정을 내렸을 때만 해도 게임은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제기한 불복 소송(취소 소송)에서 반전의 데이터가 등장합니다. 통상적으로 국제 중재 판정이 뒤집힐 확률(취소 인용률)은 고작 3%에 불과하지만, 중재지인 영국 고등법원은 이 희박한 확률을 뚫고 한국 정부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법원이 판정을 취소한 핵심 논리는 명쾌합니다. 엘리엇의 상대방인 '국민연금공단'은 정부와 분리된 별개의 법인격이며, 기금 운용 자체가 국방이나 치안 같은 국가의 핵심 기능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을 곧 '대한민국 정부의 조치'로 묶어서 FTA 위반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엘리엇 측이 쓴 소송 비용의 6분의 1만 사용하고도, 상대방의 핵심 논리적 고리를 정확히 타격하여 거액의 국고 유출을 막아낸 유의미한 시그널입니다. 앞서 론스타와의 4,000억 원 규모 배상 취소 소송 승소에 이어, 글로벌 투기 자본을 상대하는 국가의 방어 논리와 법적 역량이 눈에 띄게 고도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데이터입니다.
방어에는 성공했지만, 근본적인 체질 개선은 숙제
이번 판결로 1,600억 원의 혈세를 지켜낸 것은 분명 환영할 일입니다. 글로벌 펀드들이 한국을 상대로 더 이상 'ISDS 찔러보기'를 쉽게 할 수 없도록 강력한 선례를 남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투자자로서 우리가 이 현상에서 읽어야 할 거시적인 뷰(View)는 따로 있습니다.
소송에서는 이겼지만, 애초에 엘리엇이라는 늑대 무리가 냄새를 맡고 달려들게 만든 근본 원인인 '불투명한 지배구조 개편 과정'과 '의사결정의 모호함'이라는 우리의 틈새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행동주의 펀드는 언제나 지배구조의 취약점을 파고듭니다. 시장의 노이즈에 흔들리지 않는 현명한 투자자라면, 단순히 국가 간의 소송 결과에 안도할 것이 아니라, 외부의 공격에 빌미를 주지 않는 '주주 친화적이고 투명한 거버넌스'를 갖춘 기업을 선별하는 잣대를 더욱 날카롭게 벼려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