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권력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
사람들은 흔히 국가 최고 법원인 대법원이 제동을 걸면, 제아무리 강력한 행정부의 정책이라도 꺾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최근 미국의 무차별적인 관세 정책에 대해 대법원이 위법 판결을 내리자, 시장 일각에서는 "이제 무역 전쟁이 진정 국면에 접어들 것"이라는 낙관론이 피어올랐습니다.
하지만 이는 국제 정치와 미국 패권주의의 현실을 순진하게 바라본 결과입니다. 시장을 뒤덮은 긍정적 노이즈와 달리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갑니다. 권력은 길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의 무기가 법에 의해 금지되면, 서랍 속에 깊숙이 넣어두었던 더 독하고 치명적인 무기를 꺼내 들 뿐입니다.
잠들어 있던 '제왕적 권한'의 부활
본래 관세를 매기고 무역을 통제하는 권한은 행정부(대통령)가 아닌 '의회'에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냉전이 한창이던 1962년(무역확장법)과 1974년(무역법), 미 의회는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신속한 위기 대응을 명분으로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을 백지수표처럼 위임해 주었습니다.
국가 안보가 위협받거나 무역 수지 적자가 심각할 때, 대통령이 복잡한 의회 승인 절차 없이 직권으로 타국에 관세를 때릴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수십 년간 먼지가 쌓여있던 이 오래된 법안들은 '자국 우선주의'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을 타고 완벽하게 합법적인 무기로 부활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한 지도자의 독단이 아닙니다. 글로벌 패권을 유지하고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이라는 국가 시스템 자체가 과거에 만들어둔 '합법적 우회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장기적인 사이클의 전환점입니다.
대법원 판결을 딛고 쏘아 올린 '글로벌 관세'
최근 미 대법원이 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관세 부과에 대한 명문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기존 상호관세 조치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대중은 이를 행정부의 패배로 읽었지만, 실제 시장에 떨어진 데이터(결과값)는 한층 수위가 높아진 최고 15%의 징벌적 '글로벌 관세'였습니다.
행정부는 관세 승인을 받기 위해 의회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반세기 전 의회로부터 획득한 무역법 122조(국제수지 적자 대응)를 즉각 꺼내 들었고, 뒤이어 301조(불공정 무역 관행 조사), 232조(안보 위협 조사)까지 동원할 태세를 갖췄습니다. 핵심은 '구매자 주의(Buyer Beware)'라는 직설적인 경고입니다. 기존에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약속하고 관세 혜택을 받던 국가들이 대법원 판결을 핑계로 딴청을 피운다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더 혹독한 관세로 보복하겠다는 명확한 시그널입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고, 관세 없는 세상도 없다
흩어진 퍼즐들을 맞춰보면 결론은 선명해집니다. 미국의 관세 장벽은 법적 공방 몇 번이나 정권의 교체로 쉽게 무너질 모래성이 아닙니다.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서라면, 이미 쥐고 있는 수십 년 전의 법적 무기들을 얼마든지 입맛에 맞게 꺼내어 쓸 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투자자는 매일 쏟아지는 언론의 헤드라인이나 일시적인 법적 노이즈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대한 뷰(View)는 명확하게 '고관세 시대의 고착화와 공급망의 블록화'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과거 자유무역 시대의 잣대로 작금의 시장을 분석하면 필패합니다. 장벽이 높아지는 험악한 세상에서 늘어난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할 수 있는 압도적 해자를 가진 기업이 어디인지, 혹은 거대한 소비 시장 내부에 이미 확실한 생산 거점을 확보하여 관세의 칼날을 피할 수 있는 기업이 누구인지를 가려내는 진중하고 냉철한 시각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입니다.